[ NABIS 뉴스레터 2024-18호 ]
농부의 손길에서 우리의 식탁까지 : 쌀과 농부, 그리고 소통의 이야기
박종범
농사펀드 대표
목차
1. 이 쌀은 누가 키웠을까?
2. 영화 마션의 주인공은 어떻게 지구로 돌아왔을까?
3. 농촌과 도시 사이의 해커
4. SNS로 농사짓는 청년 농부들
5. 다시, 이 쌀은 누가 키웠을까?

1. 이 쌀은 누가 키웠을까?
오늘 먹은 밥은 누가 키운 쌀로 지었는지 알고 있나요? 거의 매일 밥을 먹고 살지만 대부분은 그 쌀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키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상온에서 오랫동안 보관되는 즉석밥도 있고 외식과 배달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쌀을 보지 못하는 날도 꽤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벼를 기르는 농부가 누군지 묻다니, 참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입니다.
가족 중에 농부 한 명쯤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약 2,300만 가구 중 농업 가구는 99만, 5%가 채 안 되는 숫자이니 이제 친척 중에 쌀을 보내줄 사람이 없는 현실입니다. 그 자리를 유통 시스템이 채우고 있습니다. 규모화, 체계화를 기본으로 하는 유통 시스템에서 개별 농부는 오히려 변수에 가깝습니다. 효과적으로 지우거나 통제해야 효율이 높아지는 구조입니다. 우리가 먹는 밥에 농부 이름이 적히지 않고 지역이나 품종으로 묶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쌀의 유통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체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생산된 쌀을 농협이나 지역의 미곡종합처리장(RPC)에 납품합니다. 여기서 쌀은 품질에 따라 분류되고, 포장된 후 대형 마트나 소매점으로 이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쌀의 출처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소비자는 결국 어느 농부의 쌀을 구매했는지 알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먹은 쌀을 누가 키웠는지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2. 마션의 주인공은 어떻게 지구로 돌아왔을까?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15년 영화 '마션'에서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화성을 탐사하던 중 모래 폭풍을 만나 혼자 남게 됩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수증기를 만들어낸 과학 지식도 아니었고, 감자 농사의 성공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노트북의 카메라와 패스파인더를 이용한 통신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죠.
현재의 농부들은 고독합니다. 존재하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모르죠. 쌀은 먹지만 그 쌀을 누가 어떻게 기르는지 모르는 것처럼요. 이 고독감 속에서 농부들은 농사를 짓습니다. 지난해 부여로 조관희 농부를 만나러 갔을 때 산속의 작은 밭에서 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500평 정도 되는 밭에 사람이라고는 농부 혼자였죠. 마치 화성에 홀로 남겨진 와트니처럼요. 농부가 농부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보다 더 연결되어야 합니다. 마션의 주인공이 로버를 끌고 불가능해 보이는 주행을 한 것도, 상승선의 해치를 띄어 버리고 우주로 날아 오른 것도 수천만 km 떨어져 있는 곳에서 그의 삶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 와트니가 겪었던 고립은 극단적이었지만, 농부들이 느끼는 고립감도 다르지 않습니다. 도시에서의 삶과 농촌에서의 삶은 너무나 다릅니다. 도시 사람들은 번잡한 일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지만, 농부들은 넓은 논밭에서 홀로 일하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와트니처럼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 줄 누군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더 연결될 수 있을까요? 영화에서 보면 패스파인더를 로버와 연결해 지구와 통신할 수 있게 해주는 해커들이 나옵니다. 그 덕분에 와트니는 자신의 생존 상황을 전달하고 지구에 있는 사람들과 보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죠. 우리에게도 이런 해커들이 필요합니다. 농촌과 도시를 연결해 줄 해커요.
3. 농촌과 도시 사이의 해커
작은 규모로 농사짓는 농부들은 판로가 불안정합니다. 대형 유통사와 계약하기에는 생산량이 부족하고, 지역 공판장을 통한 출하는 제값을 받기 어렵습니다. 온라인 직거래가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자신을 도시 소비자에게 소개할 콘텐츠가 부족했습니다.
로컬에디터
2017년 서울시 지역상생교류사업단은 중소가족농의 농산물 판로를 지원하기 위해 지역상생 청년 에디터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을 에디터로 교육해 농부를 인터뷰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6명의 청년이 농부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사진과 글, 영상 등으로 농부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그해 27명의 농부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를 통해 온라인 판매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농업·농촌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청년들도 농부들을 직접 만나 목소리를 듣고 농사에 대한 이들의 철학과 삶의 태도를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역상생 청년 에디터 프로그램은 이후 로컬에디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4개 지역에서(강원 춘천, 충남 당진, 충남 청양, 전북 고창) 25명의 에디터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로컬에디터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농산물 판매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농촌과 도시 간의 문화적, 정서적 교류를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청년 에디터들은 농부들의 이야기를 통해 농업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농부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면서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교류는 농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시골언니
도시 쪽에 ‘로컬에디터’가 있다면 농촌 쪽에는 ‘시골언니’가 있습니다. 2022년부터 2023년까지 농림축산식품부와 함께 농업·농촌에 관심 있는 청년 여성들을 위한 탐색 단계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지역에 살아보기 전 막막한 청년들이 농촌과 지역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청년 여성 농업·농촌 탐색 교육의 핵심은 ‘시골언니’였습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을 탐색하는 청년 여성들이 만나게 될 농촌의 다양한 면들을 먼저 경험하고 그것에 상처받지 않도록 품을 내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찾아 ‘시골언니’로 부르고 도시 청년 여성과 연결했습니다. 2년 동안 500명에 가까운 청년 여성들이 시골언니를 만나 지역을 탐색했고 그중 일부는 지역에 남아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골언니
‘로컬에디터’와 ‘시골언니’처럼 농촌과 도시 사이에는 이 둘을 연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영화 ‘마션’의 해커들처럼요. 이 해커들이 사용하는 공통 해킹 기술은 무엇이었을까요?
4. SNS로 농사짓는 청년 농부들
그 힌트는 청년 농부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일의 특성상 많은 농부들을 만납니다. 그중에는 비교적 젊은 20대~40대 청년 농부들도 있습니다. 농사짓는 기술은 30년 이상의 베테랑 농부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청년 농부들이 월등히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통입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 다양한 디바이스를 보다 쉽게 활용하며 SNS를 통해 농사짓는 과정을 공유합니다. 도시 소비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과정이 공개되니 멀리 떨어져 있는 소비자들도 안심하고 구매하게 됩니다. 구매를 넘어 응원하는 관계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SNS 농사라고 부를 만합니다.
청년 농부들에게 SNS는 소통을 돕는 도구입니다. 소비자들의 반응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자신의 농사에 접목합니다. 도시 소비자도 상품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키운 사람을 보게 됩니다. 로컬에디터가 했던, 시골언니가 했던 해킹의 기술도 사실 ‘소통’입니다.
SNS는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 농부들에게는 마케팅과 브랜딩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농부들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일상적인 농사 과정, 재배 방법, 농산물의 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공유합니다. 이러한 투명한 소통은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또한, 농부들은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어, 이를 바탕으로 농사 방법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SNS를 통해 농부들은 자신의 농산물을 브랜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농부 개인의 이야기와 철학을 담아내는 콘텐츠는 단순한 제품 광고를 넘어, 소비자와의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농산물의 가치를 높이고, 더 나아가 농촌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5. 다시, 이 쌀은 누가 키웠을까?
오늘 먹은 밥은 누가 키운 쌀로 지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농촌과 도시 사이에 ‘소통의 기술’을 가진 해커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이런 소통을 통해 쌀을 생산하는 농부들도 “아, 요즘은 10kg 쌀 양이 너무 많은 거구나.” “비닐 포장재 말고 친환경 포장재를 고민해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도 이 쌀이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지, 누군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를 알게 될 때 농촌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행성에 누군가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역 소멸이 내 문제가 아닌 지역의 문제로 읽히는 것은 그 지역에 내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정 시스템이 빠지고, 버스가 더 이상 운영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불편함을 감수할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해커들이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야 합니다. 특히 더 많은 농부들을 연결해야 합니다. 농촌에 보급선을 보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농부와 소비자가 더 깊이 연결될 때, 우리는 단순히 식재료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식재료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소비하게 됩니다. 농부들이 겪는 어려움, 그들이 가진 철학, 그리고 농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 등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책임 있는 소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농촌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농부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