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BIS 뉴스레터 2025-3호 ]
장소의 이름이 구축하는 도시의 레거시
김정후
런던시티대학 / 도시건축정책연구소 소장
1. 장소의 혼
2. 거리의 이름에 담긴 도시의 서사
3. 지하철역과 기차역의 이름에 담긴 도시의 서사
4. 이름표가 아닌 이음표

1. 장소의 혼
유럽에는 수백 년은 기본이고 천 년이 넘은 건물들이 건재하다. 파리, 로마, 프라하와 같은 역사도시들은 새 건물보다 오히려 오래된 건물이 더 많다. 그래서 유럽은 조상 덕에 먹고 산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오래된 건물들을 보기 위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므로 딱히 틀린 주장은 아니다. 또한 오래된 건물들로 구성된 도시와 마을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지속적인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도시가 오래된 건물을 많이 보유한 것은 ‘건립’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보호’와 ‘관리’가 철저하다는 의미다. 높은 수준의 보호와 관리는 역사 유산과 지역 자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토대로 치밀한 제도를 수립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옛것을 잘 간직하고 활용하면서 후대에 전하는 전통은 건물이나 시설 등의 물리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도시에 존재하는 대상에 붙이는 이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특정한 건물, 장소, 거리를 칭하는 이름은 그 자체로 삶의 흔적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런던 동쪽의 스피탈필즈(Spitalfields) 지역은 전통적인 상업지역으로서 과거부터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시장들이 자리 잡았다. 최근에, 이 일대에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쇠퇴한 기존 건물을 리노베이션하여 대형 상업업무공간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 건물의 이름이 ‘런던 과일양모거래소(London Fruit & Wool Exchange)'로 결정되었다. 본래 이곳이 1929년부터 60여 년 동안 과일과 양모를 거래했던 장소였기에 역사적 의미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건물의 정면에 런던 과일양모거래소라는 이름을 새겨 넣어서 시민과 방문객 모두 지역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
런던 과일양모거래소
도시에서 ‘장소의 혼(Genius Loci)’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나의 장소에 유무형의 역사와 흔적이 쌓이면서 독특한 정체성을 보유한다는 개념이다. 변함없이 도시에서 장소의 혼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하여 활성화를 위한 원동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런던 과일양모거래소처럼 완전히 새로운 장소로 재생되었지만, 이곳에 사용되었던 고유한 이름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장소의 혼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2. 거리의 이름에 담긴 도시의 서사
고유한 장소의 이름을 유지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거리, 기차역, 지하철역 등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안토니 배지 엘리스(Antony Badsey-Ellis)가 저술한 “거리의 이름에는 무엇이 담겨있나?(What’s in a Street Name?)”와 시릴 해리스(Cyril M. Harris)가 저술한 “이름에는 무엇이 담겨있나?(What’s in a Name?)”는 도시에 존재하는 고유한 명칭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안토니 배지 엘리스의 저술은 영국의 거리, 시릴 해리스의 저술은 영국의 기차역과 지하철역의 이름에 담긴 기원과 의미를 설명한다.
두 저자가 설명하는 거리와 지하철역·기차역의 이름은 공통적으로 오랜 역사와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닌다. 그러므로 거리와 지하철역·기차역의 이름 자체가 곧 도시의 살아있는 생생한 '서사(Narrative)‘다. 다시 말해, 이름이 곧 해당 장소가 탄생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권의 책에서 다루는 주요 거리와 지하철역·기차역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먼저 거리의 이름을 살펴보자. ‘루드게이트 힐(Ludgate Hill)’은 영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향하는 완만한 언덕길이다. 이 거리는 로마인들이 영국으로 들어온 가장 오래된 관문으로서 이를 건립한 ‘루드 왕(King Lud)’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000년이 넘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지명 중의 하나로서 누구나 쉽게 거리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