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BIS 뉴스레터 2025-9호 ]
바르셀로나 슈퍼블록: 걷고 머무르는 도시가 지역을 살린다
강미현
건축사사무소 예감 소장
원광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길은 누구를 위한 공간일까?
바르셀로나 슈퍼블록, 도시를 바꾸다
한국에서의 슈퍼블록 적용 전략
도시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길은 누구를 위한 공간일까?
우리는 길을 이동을 위한 단순한 통로로 여기지만, 본래 길은 단순히 '이동'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과거 유럽의 광장이나 우리나라의 전통 시장 골목이 보여주듯, 길은 사회적 교류가 일어나는 '공적 생활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좁은 길에서 우연히 이웃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관계를 맺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도시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대 도시는 이러한 길의 사회적 기능을 크게 잃어버렸다. 산업화 이후 도시가 팽창하고 교통량이 급증하면서, 길은 점차 사람 중심이 아니라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되기 시작했다. 도시의 혼잡을 해소하려 도로를 넓혔지만, 오히려 더 많은 차량을 끌어들이는 '유도 수요 효과(Induced Demand)'가 나타났다. 결국 도시는 사람 간의 교류보다 교통의 효율성을 중시하게 되었고, 길은 삶과 관계가 아니라 효율성과 속도를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세계 각국에서는 '사람 중심의 도시'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도시계획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15분 도시(15-Minute City)'이다. 이는 도시 내 모든 필수 시설을 걸어서 15분 이내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계획하여, 길을 다시 사람들의 일상적 소통과 관계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 되살리는 시도다. 보행 환경을 개선하여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며, 결과적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일본 도쿄에서 성공적으로 적용된 '컴팩트시티(Compact City)'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도시의 밀도를 높여, 효율적인 대중교통망과 보행 친화적인 환경을 구축함으로써 환경적, 사회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도시전략이다. 이를 통해 차량 중심의 문제를 완화하고, 지역 경제 활성화와 환경적 지속 가능성까지 높인 바 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바르셀로나의 '슈퍼블록(Superblock)' 프로젝트는 길이 본래 품었던 공적 기능과 사회적 가치를 회복하는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슈퍼블록은 블록 내 도로에서 자동차 진입을 최소화하여 보행자와 자전거에 우선권을 주고, 남는 여유 공간을 공공녹지, 휴식 공간, 커뮤니티 공간으로 전환한다. 이는 도로의 효율성보다는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는 접근 방식으로, 도시 생활에 활력과 인간적 교류를 되살리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도시에서 '길'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우리가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지, 도시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과 직결된다. 길을 통해 회복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며, 더 나아가 도시 공동체의 삶의 질과 그 도시의 정체성이다. 현대 도시가 단지 교통의 효율성을 넘어서 다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길'에 담긴 삶의 가치와 사회적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도시 설계의 기술적 문제를 넘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도시의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 슈퍼블록, 도시를 바꾸다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르셀로나는 오랜 세월 동안 보행자가 중심이 되는 도시 구조를 유지해 왔다. 중세 시대부터 형성된 고딕 지구만 봐도, 당시에는 자동차가 전혀 없었으므로 골목길과 광장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동과 교류를 중심에 두고 설계되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진 작은 광장들은 시장과 축제, 일상적 만남이 열리는 생활공간이었고, 주민들은 걸어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자동차가 도시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차가 우선시되는 환경이 되었다. 그 결과 교통체증과 대기오염 문제가 커졌고, 거주민들이 느끼던 도시의 매력은 감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6년에 시작된 ‘슈퍼블록 프로젝트’는 다시금 바르셀로나를 사람 중심의 도시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슈퍼블록 프로젝트’는 도시를 작은 단위(약 400m × 400m의 3×3 블록)로 묶어 차량 이동을 최소화하고 보행자와 자전거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혁신적인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슈퍼블록 내 차량 속도를 시속 10~20km 이하로 엄격히 제한하고, 거주자 및 필수 차량 외 진입을 제한함으로써 자동차의 존재감을 줄였다. 대신 공공공간을 확장해 주민들이 더 많이 걷고, 쉬고, 자연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말하자면 자동차가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밀려나고, 다시 사람이 도시 공간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슈퍼블록, 도시를 살리는 변화
슈퍼블록 프로젝트의 핵심은 매우 철저한 계획과 신중한 단계적 도입에 있었다. 바르셀로나시 정부는 도시 공간을 재편하기 전, 먼저 철저한 시범 사업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다. 시민들이 직접 느끼는 교통 혼잡 문제부터, 보행로의 안전성과 지역 상권에 미칠 영향까지 세부적인 데이터를 분석하고 평가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중교통 노선을 꼼꼼히 재조정하고 전기 셔틀버스, 자전거 공유 서비스 등 다양한 대체 교통수단을 도입하여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슈퍼블록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도시가 더 이상 단순히 '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무르고 소통하며 살아가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공원과 놀이터, 그리고 각종 문화공간이 늘어나면서 거리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도시의 거리는 이제 지나가는 차량 대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벤치에서 쉬는 노인들, 카페 앞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확장된 보행자 공간은 사람들의 행동 방식까지 바꿨다. 상점가에는 차량 접근이 제한되었지만, 오히려 보행자가 많아져 상점 매출이 약 30% 증가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또한, 차량 통행이 줄어들며 교통사고 발생률이 현저히 감소하고 도시는 더욱 안전한 곳으로 변화했다.
도시의 삶이 본래의 인간 중심으로 회복되었다는 점에서 슈퍼블록 프로젝트는 사회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사례이다. 사회학자들은 보행자 친화적인 공공공간이 많아질수록 지역사회의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이 강해진다고 주장한다. 슈퍼블록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도시 구조를 바꾸는 교통 정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민들이 서로를 인지하고 교류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망을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슈퍼블록 적용 전략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전략적 접근
한국의 도시들은 각각 고유한 특징과 환경을 가지고 있어, 바르셀로나 슈퍼블록을 그대로 옮겨오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특히 서울이나 부산처럼 이미 밀집된 도시 구조와 복잡한 교통 시스템을 갖춘 대도시에서는, 한꺼번에 넓은 구역에 대규모로 슈퍼블록을 도입하기가 쉽지 않다. 차량 흐름의 급격한 변화나 상권·주민들의 일상에 미칠 파급 효과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도시 전역을 한 번에 바꾸는 방식보다는, 점진적이고 실험적인 접근을 통해 시민 불편과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슈퍼블록의 효과를 검증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중소도시는 기존 관광·문화 인프라와 슈퍼블록 모델을 접목함으로써 관광객 유입, 지역경제 활성화, 도시재생을 동시에 달성할 잠재력이 크다. 또한, 대도시보다 상대적으로 도입 장벽이 낮고 시행 효과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으므로, 보행 중심 도시정책의 확산을 끌어낼 성공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전주, 순천, 강릉 같은 중소도시는 상대적으로 보행 환경이 이미 잘 조성된 관광지나 전통 거리와 연계하기가 쉬워, 슈퍼블록 개념을 도입하기에 좋은 토대를 갖추고 있다. 전주의 경우 한옥마을이 이미 자동차 없는 보행 중심 공간으로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데, 이를 인접 지역으로 확대함으로써 관광객의 이동 범위를 자연스럽게 넓힐 수 있고, 관광 동선 확장에 따라 지역 상권이 함께 활성화되면서 도시재생 역시 탄력을 받게 된다. 순천 역시 생태관광이 발달해 있는데, 도시 중심부나 관광지 인근의 보행 중심 거리를 슈퍼블록 형태로 재편하면 방문객의 체류 시간이 늘어나고, 지역 특색을 살린 체험 프로그램이나 문화 행사 등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다.
또한, 앞으로 조성되는 신도시 지역은 도시계획 단계부터 슈퍼블록 개념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차량의 접근성을 도시 외곽으로 한정하고, 중심부는 보행자와 자전거 친화적인 공간으로 구성함으로써 도시를 환경 측면으로도 지속 가능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신도시 설계 단계에서부터 보행 친화적 도로망과 공공시설을 배치한다면 장기적으로 더 건강하고 활력 있는 도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한국의 슈퍼블록 적용 전략은 도시의 규모, 인구밀도, 사회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맞춤형 접근이 필수적이며, 이는 도시의 물리적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공동체 의식까지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사회학적 실험이 될 것이다.

정책적 지원과 함께 고려할 요소
슈퍼블록 도입은 단지 도로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복잡한 사회적 관계와 경제적 구조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다층적인 프로젝트다. 자동차 이용을 제한하면 당연히 보행자와 자전거, 대중교통 이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교통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다. 대중교통 노선을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자전거 도로망을 확장하며, 전기 셔틀버스처럼 친환경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교통수단을 함께 도입하는 통합적 전략이 요구된다.
또한, 슈퍼블록의 성공 여부는 지역 상권과의 관계에도 크게 의존한다. 차량 제한으로 인해 소비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상인들의 우려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보행자 전용 지역 내에서 정기적으로 시장이나 축제를 개최하거나 길거리 문화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보행자의 방문을 증가시키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유도해야 한다.
더불어 슈퍼블록 정책은 사회적 약자, 특히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도시 생활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 저상 버스 확대, 보행자용 경사로 설치, 이동 편의를 돕는 다양한 인프라 구축 등을 통해 사회적 포용성을 높이는 접근이 필요하다. 결국, 슈퍼블록은 물리적 변화뿐 아니라 사회적 포용성과 경제적 활력을 함께 가져오는 종합적인 도시정책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
시민 참여가 만드는 성공적 도시재생
도시정책의 성공은 시민들이 직접 주인공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시민들의 참여는 단지 의견을 듣는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책 결정에서부터 시행, 평가 과정 전반에 걸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공청회에서 지역 주민들이 슈퍼블록 도입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주민 참여 워크숍을 통해 거리 디자인과 시설물 배치에 대한 의견을 직접 반영할 수 있다. 또한, 시민 주도의 보행 환경 개선 캠페인을 통해 지역사회 스스로가 보행 친화적 환경을 만들어가는 경험도 매우 중요하다.
SNS나 온라인 지역 커뮤니티는 이런 시민 참여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시민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고, 문제점과 성공 사례를 적극적으로 나누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공론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이처럼 시민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때, 슈퍼블록과 같은 혁신적인 도시정책은 지속 가능하고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도시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바르셀로나 슈퍼블록 프로젝트는 단지 도시의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사회적 구조와 시민들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의미 깊은 실험이다. 이는 자동차가 줄고 보행로가 넓어진다는 차원을 넘어서, 도시 공간에서 시민들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고 사회적 교류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슈퍼블록은 도시가 본래 가져야 하는 공동체 의식과 이웃 간의 친밀감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도시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동차 중심에서 벗어나 보행자 중심으로 도시의 초점을 바꿀 때 지역경제는 활성화되고, 주민 간의 사회적 유대감은 강해지며, 결과적으로 도시 전체의 지속가능성도 높아진다. 이제 한국도 각 도시의 고유한 특성을 고려한 다양한 슈퍼블록 실험을 통해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를 만들어 나갈 때가 되었다. 사람을 중심에 둔 도시 설계는 단순한 정책 변화가 아니라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과제이다. 그러한 도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지속가능하고 활력 넘치는 지역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강미현
건축사사무소 예감 소장
원광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전북 건축문화상, 전주시 아름다운 건축상을 다수 수상했으며,
전주시 예술상 수상자이다.
주요 저서로 『집을 짓고 건축가를 만나라』가 있다.
사람과 공동체를 위한 건축과 도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슈퍼블록 바르셀로나- 우리가 꿈꾸는 도시를 향하여 / Superblock Barcelona Towards the City We Want/ 사비 마틸라(Xavier Matilla)/ 국토교통부,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Ajuntament de Barcelona. (2022). Superblocks: New public spaces in Barcelona PDF문서. Barcelona City Council (미간행 간행물).
서울연구원. (2023). 서울 2040 도시기본계획 보고서.
제주일보. (2025, 1월 6일). 15분 도시 제주 조성...시범지구에서 본격 시행
https://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5761
Christoforaki, K. (2024). Towards a sustainable urban future: The 15-minute city approach in Paris, France. Sustainable Development, Culture, Traditions, 2a/2024, 33-43. https://doi.org/10.26341/issn.2241-4002-2024-2a-3-T02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