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사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직장 따라, 교육 때문에 젊은이들은 떠나가 버리고 농촌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만 남겨졌다. 우리나라 읍·면 단위 농촌지역은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구성비가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로 급속도로 진입하였다. 도시보다 2배 이상 높은 비율이다(통계청, 2010년 자료). 식탁을 점령한 수입 농산물로 인해 경제적 타격은 물론,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긴 농촌사회는 존립마저 위협 받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건강·의료 부분이다. 노인 단독가구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보건의료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는 지역이 많아 사회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실정이다.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고 마땅한 소일거리도 없다보니 농촌지역 노인들은 고독감과 소외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간 정부와 지자체에서 농촌의 현실을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지원 사업을 추진해왔다. 그중 하나가 2005년부터 농촌진흥청에서 추진한 농촌건강장수마을 사업이다. 이제껏 농촌 지원 사업이 농가소득을 늘리거나 건물을 지어주는 등 하드웨어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면, 농촌건강장수마을은 주민 의식 전환과 자생력을 높이는 소프트웨어적인 사업이다. 농촌 노인들이 지닌 연륜과 문화적 자산을 활용하여 생산적인 여가활동을 지원해주고, 농촌의 잠재되어 있는 자원과 특색을 발굴해 도시민과의 교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로써 향후 농촌 스스로 자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농촌건강장수마을사업이 시작된 지 어느덧 8년, 그간 우리 농촌 마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농촌건강장수마을사업을 진행한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독정4리 마을을 방문했다.
전국 팔도 이주민이 모여 만든 마을
화성 8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남양황라(南陽黃羅)’. 서해 남양만을 2,065m의 방조제로 막아 조성된 1,211ha의 남양 간척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 드넓은 간척 농지에서 쾌청한 하늘 아래 노랗게 벼가 익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풍요로워지는 기분이다. 화성시 독정4리는 1973년 남양 간척지 공사가 완료되며 조성된 마을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제 땅을 일굴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20대 후반부터 30~40대까지 한창나이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타지에서 이주한 젊은 농사꾼들은 땀과 눈물 그리고 청춘을 바쳐 염분 지수가 높은 간척지를 벼가 자랄 수 있는 옥토로 탈바꿈시켰다. 남양 간척지의 풍부한 햇살과 청정수에서 자란 쌀은 염실이 좋고 알칼리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경기미 중에서도 최고의 미질로 인정받고 있다. 이 쌀은 화성의 친환경 고품질 농산물에만 부여되는 ‘햇살드리’ 브랜드 마크를 달고 전국에 유통된다.
마을이 조성된 지 40여 년, 젊은 패기로 똘똘 뭉쳤던 청년들은 대부분 주름이 깊게 패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독정4리 역시 자식과 손자들은 도시로 보내고 노인들만 마을에 남았다. 현재 마을 전체 인구는 57가구 98명으로 고령화율이 무려 64%에 달한다. 환갑이 지난 정도로는 노인회에 끼지도 못하는 대표적인 초고령 마을이다. 인구 고령화와 함께 이 마을에는 다른 지역에는 없는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주민 단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수백 년 동안 같은 지역에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농촌사회와 달리, 타지 사람들이 모여 만든 불과 40년 된 마을인 까닭이다. 이 때문에 그간 웃지 못 할 일들도 많았다. 명절날 윷놀이라도 할라치면 경기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서로 자기 고장 규칙이 맞는다고 주장해 놀이가 중단되고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서로의 마음이 일치되기 어려우니 다툼도 잦고 남을 배려하려는 생각도 적었다.
달리는 추진위원장과 슈퍼우먼 부녀회장
011년 농촌장수건강마을사업에 선정되었을 때도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귀찮게 할 거 아니냐.”며 미간을 찌푸리는 마을 주민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한 이는 조희수 추진위원장이었다. 지금보다 더 좋은 마을이 될 수 있고 주민들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근 마을에서 진행된 다른 마을 사업을 지켜보며 주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 없이는 사업 진행은 물론 이후 지속되기가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사업 초기 주민들은 하수관 교체, 안길 포장 등 마을의 낡은 시설을 보수·교체하는 정도를 원했다. 하지만 장수마을사업 취지에 맞지 않을뿐더러 소소한 공사 몇 가지로 마을에 어떤 효과가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마을사업 하면 으레 이런 것을 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지우는 일이 시급했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진지 견학이 우선적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보다 마을의 자원이나 여건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오로지 주민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변화된 여러 농촌 마을을 지켜보곤 독정4리 주민들의 생각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농촌건강장수마을의 기획 단계부터 추진 과정, 결과물은 마을 인터넷 카페에 수시로 업데이트되어 누구든 사업의 진행상황을 알 수 있게끔 했다. 여기엔 추진위원회의 총무인 김미혜 부녀회장의 공이 컸다. 사진 촬영은 물론 영상 제작과 인터넷 카페 운영 등 노인들은 엄두도 못 내는 ‘최첨단’의 업무를 척척 해냈다. ‘시골에서 썩기 아까운 인재’라는 칭찬이 안팎에서 쏟아졌다. 독정 4리 마을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화성시농업기술센터 신미영 팀장은 남다른 소회를 전했다.
“사실 농촌에는 김미혜 부녀회장님 같은 분들이 정말 필요해요. 장수마을사업의 경우 농촌지도사가 옆에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거든요. 마을에 사시는 분들이 열정을 가지고 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게다가 이런 분들이 있어야 예산 지원이 종료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마을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거든요.”
처음엔 추진위원회만의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 점차 마을 노인회, 청년회, 부인회 등 다 함께 합심해 나가는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김미혜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부녀회에선 마을 농산물을 가공·판매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마을의 친인척들을 초청해 매년 8월 열리는 ‘한마음 축제’의 경우에도 추진위원회가 하던 것을 이후 청년회에서 그 뜻을 이어받아 꾸준한 마을 행사로 추진할 계획이다.
우리 마을이 달라졌어요!
독정4리 농촌건강장수마을사업에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매년 5000만원씩 총 1억50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국비와 시비로 반반씩 부담했다. 첫 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마을환경 정비 사업이다. 마을운동장 보수, 건강 지압길·마을화단·주민쉼터·벽화 조성을 통해 보다 쾌적하고 편리한 마을로 변모했다. 이 가운데 벽화 조성은 가장 큰 효과를 거둔 사업이다. 마을의 첫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벽화 조성은 타 지역 마을 사업에서도 많이 볼 수 있던 것으로, 그간 벽화가 주로 미술가의 개인적인 스타일이나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이와 달리 독정4리 마을에선 미술가에게 전적으로 맡기기 보다 마을 주민들이 원하는 이미지나 소원 등이 반영된 벽화가 그려졌다. 김광국 할아버지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소중히 간직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새하얀 알프스산맥의 설원.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다짐하며 품고 있던 소원을 이번 벽화 작업에서 풀어놓았다. 할아버지의 집 담벼락은 알프스 설원을 배경으로 야생마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가득 채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와~진짜 멋지다”라며 감탄을 쏟아낸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나비가, 또 누군가에겐 먼 옛날 떠나온 고향마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집 텃밭에서 키운 싱싱한 채소가 저 나름의 의미를 갖고 담벼락에 그려졌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이 개성이 넘친다. 마을 구석구석 숨어 있는 스무 개의 벽화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희수 추진위원장은 마을이 몰라볼 정도로 밝고 화사해졌다고 말한다.
“힘든 농사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기분이 달라요. 멀리서 알록달록 예쁜 벽화가 보이면 여기가 우리 집이 맞나 싶고 정말 좋습니다.”
이듬해엔 마을의 중심 시설이랄 수 있는 마을회관도 정비되었다. 어르신들이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건강 장판을 새로 깔고 소파도 들여놓았다. 무릎이 안 좋아 앉고 일어서는 일도 때론 고역인 어르신들에겐 푹신한 소파가 꼭 필요했다. 남녀 공용으로 사용하던 마을 회관 화장실 시설도 확충 공사를 통해 구분하고 미끄럼방지매트와 같은 안전장치도 설치했다. 마을회관 정비 후엔 예전보다 주민들이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덕분에 마을회관에 나오지 않으면 궁금해 하고 서로 집에 찾아가 보는 등 최근에 주민들 사이가 더 돈독해졌다고 한다. 이웃 간에도 서먹하던 예전에 비해 마을엔 온정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다.
다시 찾은 청춘, 20년은 젊어진 마을
농촌건강장수 마을의 주요사업 중 하나는 다양한 학습과 사회활동을 통해 노인들에게 삶의 활력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웃음치료, 도자기공예, 풍물놀이, 한지공예, 컴퓨터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호응이 높았던 프로그램은 풍물놀이다. 처음엔 “이 나이에 무슨 풍물놀이냐.”며 시큰둥하던 어르신들도 주 2회 하던 수업을 강사를 구하지 못해 잠시 주 1회로 축소하자 항의가 속출할 나올 정도로 풍물놀이의 매력에 푹 빠졌다. 북, 장구, 소고, 꽹과리 등 주로 때리고 두드리는 전통 악기의 특성상 스트레스까지 함께 날려버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1석 2조. 첫 해 38회에서 둘째 해에 46회로 강의 횟수가 더 늘어났고 3년째에 접어들자 이젠 마을 행사나 손님 방문 시에 공연할 수준까지 도달했다. 할아버지 8명, 할머니 9명으로 구성된 놀이패가 한바탕 신명나게 놀이판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마을 주민들은 요즘처럼 하루하루 신나고 즐거웠던 적이 언제였나 싶다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장수마을사업을 통해 높아진 애향심은 그대로 도시로 나가 살고 있는 자식, 손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살기 좋은 우리 동네를 자손들에게 푸근한 고향으로 돌려주자는 취지에서 ‘고향 찾기 프로젝트’를 계획한 것이다. 고향의 의미가 퇴색된 요즘 내가 자란 곳, 지금 우리 부모·조부모가 살고 있는 곳을 고향으로 삼자는 의미이다. 그 일환으로 지난 2012년 8월 15일 ‘제1회 한마음축제’가 개최되었다. 청팀·홍팀으로 나뉘어 피구, 족구 등의 경기를 벌이고 아들과 아버지의 2인3각 경기,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풍선 터트리기 등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게임을 즐겼다. 200여 명이 참석한 한마음축제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성황리에 치러졌다. 이름 그대로 고향에 대한 모두의 마음이 하나 됨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제2회 한마음축제가 올해 8월 더욱 알찬 내용으로 열릴 예정이다.
내가 만든 쌀뻥튀기가 마을 운영비로
독정4리 마을은‘2012년 건강장수문화 우수실천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농촌진흥청에서 2011년부터 추진 중인 전국의 장수마을을 대상으로 추진실적, 마을의 변화 정도, 주민 간 소통, 향후계획 등에 중점을 두고 심사한 결과다. 뜻밖의 값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성과는 화투나 치며 시간을 때우고 시내에 가는 일이라고는 병원이나 장 보러 가는 게 고작이던 주민들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취미를 발견하고 소일거리가 생기니 삶의 목표도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마을 주민들은 사업비 지원 중단 이후 경제적 자립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부터 마을 특산물인 햇살드리쌀로 가공한 뻥튀기를 판매하고 있다. 화성시농업기술센터 신미영 팀장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이를 현실화한 건 오로지 주민들의 힘이었다. 뻥튀기 기계를 사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현미쌀 70%, 찹쌀현미 15%, 찹쌀 15%가 함유된 100% 쌀 뻥튀기가 탄생했다. 약간의 천일염 외엔 어떤 첨가물도 들어가지 않은 진정한 웰빙 간식이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건강한 단맛이 일품이다. 내 아이에게도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간식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인터넷을 통해 심심치 않게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부녀회에서는 쌀 뻥튀기를 단순히 판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야채나 과일을 얹은 카나페, 견과류·우유와 함께 즐길 수 있는 후레이크 등 다양한 요리법을 개발하고 있다. 향후 뻥튀기 판매시설을 확충하고 다양한 쌀 가공품을 개발해 나갈 예정이다. 또한 도자기 공예를 통해 만든 투박한 흙 화분에 다육식물을 심어 판매하기도 했다. 아직까지 행사나 축제 때가 아니면 판로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지만 이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기대는 크다. 수익금이 많지 않더라도 향후 마을 운영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내가 만든 쌀 뻥튀기, 도자기 화분이 앞으로 풍물놀이 강사료를 내는 데 쓰이는 것이다. 지금 독정4리 주민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농촌건강장수마을의 목표는 그럴싸한 결과물이나 높은 수익금을 내는 데 있지 않다. 수명 백세 시대에 앞으로 30~40년은 족히 남은 농촌 주민들의 삶이 보다 윤택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웃 사이가 돈독해지고 때때로 신명나게 풍물놀이를 즐기고 마을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독정4리 주민들. 40년 전 척박한 땅을 일구었던 청춘의 뜨거운 에너지가 다시 한 번 마을에 감돌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