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로마로 통하던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물이다. 기원전 300년경 로마인들은 산으로 막히면 터널을 뚫고 계곡을 건너기 위해 교각을 세우며 장장 578km의 수도관을 건설하였다. 수백 년간 이루어진 대공사는 오로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도시 안으로 끌이기 위해서였다.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다. 오염된 물로 인해 각종 질병에 노출되고 악취 등 여러 가지 불편을 겪었던 로마인들에게 가히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물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상수도 시설은 가장 기본적인 복지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상수도 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초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전국 상수도 보급률은 97.5%에 달한다(환경부, 2011년 자료).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광경은 현대인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런 와중에 최근까지도 물 부족으로 불편을 겪고 있던 지역이 있다면 어떨까. 마을이 생긴 이래 물과의 외로운 사투를 벌여온 추자도 이야기다. 1998년 해수담수화사업을 시작으로 안정적인 물 공급을 위해 불철주야 달려온 추자도 사람들.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하게 물을 쓰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돈은 빌려줘도 물은 빌려주지 않는다
추자도는 제주도 본섬과 전라남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고 여의도보다 조금 작은 면적 7.05㎢의 섬이다. 마라도, 우도, 가파도 등 제주의 여러 섬 가운데 가장 크다. 연도교가 놓인 상·하추자도를 비롯해 추포도, 횡간도 등 네 곳의 섬에 2,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유인도 주변으로는 크고 작은 38개의 무인도가 흩뿌려져 ‘제주도의 다도해’로 불릴 만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추자도 연·근해는 참조기·참돔·감성돔·농어 등 어종이 다양하고 풍부해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바다낚시의 천국’으로 이름 높다. 연간 4~5만 명의 관광객 중 대부분이 낚시꾼이다. 지역민의 주 업종도 어업이다. 특히 청정해역에서 잡아 올린 참조기는 지역 경제의 1등 공신이다. 예전에는 참조기를 전라남도 영광 등 굴비 산지에 팔았지만 지금은 추자도 내 굴비 가공공장에서 직접 생산한다. 1년 이상 간수가 빠진 천일염을 쓰고 해풍에서 자연 건조한 추자도 참굴비는 짜지 않고 담백한 맛을 뽐내 전국적으로도 명품 대접을 받는다. 올해 6회째를 맞은 추자도참굴비축제도 수많은 인파 속에 성황리에 치렀다.
물고기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지만 논밭은 거의 없다. 태풍이 불어 닥쳐 한 달간 섬 밖으로 나가는 배가 끊기자 채소, 라면, 계란이 가장 먼저 동이 났다. 추자도에 귀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추자도는 비가 적은 지역이다. 연강수량이 1,000~1,500mm 정도이고 어떤 해에는 800mm에 그친 적도 있다. 제주도가 평균적으로 연간 2,000mm의 비가 내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게다가 본섬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현무암에는 물이 잘 스며드는 것과 달리, 추자도는 조직이 치밀한 심성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까운 물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가버린다.
집집마다 파놓은 작은 우물을 제외하면 상·하추자도에 위치한 4개소의 저수지에서 월 1회 가정 물탱크로 급수되는 용수가 전부였다. 추자도의 1인 1일 급수량은 191ℓ로 제주도 여타 지역의 절반 수준이다. 극심한 가뭄 시에는 해군의 급수선이 육지에서 물을 운반해 주면 양동이를 들고 나와 받아다 사용하기도 했다. 추자도에서는 물을 아끼는 것이 자연스레 몸에 밸 수밖에 없다. 세수한 물로 걸레 빠는 것은 당연지사, 밤사이 이슬이 맺히면 그 물도 아까워서 일일이 받아 놨다. 오죽하면 “추자도 사람들은 돈은 빌려줘도 물은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저주 받은 섬’이라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나올 법하다. 생활의 불편함도 문제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관광객이 급증하고 참굴비 사업이 성장하면서 급수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역 현안이 되었다.
빗물에서 답을 찾다
도서지역에서 물을 다량으로 얻는 가장 보편적인 해법은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해 음용수화 하는 해수담수화사업이다. 어떤 상황에서건 안정적으로 원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생산단가가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추자도의 지속가능한 급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해수담수화사업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주도 수자원본부 상수도부 김우찬 기술사는 빗물에 주목했다. 전 세계적으로 빗물은 수자원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흘려지는 빗물 관리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지속가능하고 에너지가 적게 들며 친환경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 빗물은 여과 과정이 단순하고 생산량이 많아 생산 단가가 해수담수화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물맛도 더 좋다. 김우찬 기술사는 “그간 수자원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해수담수화의 화려한 겉모습에 현혹되어 빗물을 등한시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로써 비가 많이 오는 하절기에는 고도정수처리시설을 통해 최대한 빗물을 사용하고 가뭄이 드는 동절기에는 해수담수화시설을 활용하는 원수 다원화 시스템이 이 사업의 초석이 되었다. 우선, 흘려서 버려지는 빗물을 최대한 모아야 했다. 기존 4개 저수지에 더해 추가 적으로 복류수 개발이 이루어졌다. 묵리와 예초리의 복류수를 개발을 통해 저수량을 연간 19만톤에서 37만6000톤까지 끌어올렸다.
기존 급수 시설의 개량 및 증설 사업도 시급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추자도에는 해수담수화 시설사업이 추진되어 1일 1,000톤 규모의 용수를 확보하게 되었고, 빗물 저수지 용수 800톤을 혼합하여 월 3~5회 급수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처음 도입한 해수담수화시설은 잦은 고장이 발생하는 등 기술적으로 불안정했고, 빗물 저수지 용수는 모래여과를 하여 물맛이 짜고 탁도가 불균일했다. 2008년 타당성 조사에서 기존 시설을 최대한 사용하는 방향으로 계획되었으나, 매일 급수체계의 확립을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했다. 이에 해수담수화시설을 1일 1,500톤으로 증설하고 빗물의 고도정수처리시설을 도입해 1일 1,000톤의 용수를 확보하는 방안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선 이미 책정된 총사업비에서 무려 50% 이상 증액되어야 했다. 환경부의 총사업비 변경 승인 및 투융자 재심사를 받아야 하는 녹록치 않은 상황에 믿을 것은 진심 밖에 없었다. 김우찬 기술사는 환경부를 수차례 방문하여 도서지역의 실정과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제한적인 급수가 아니라 매일 급수야말로 행정 차원에서 해야 하는 물 복지의 일환임을 강조하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10년 8월 30일 마침내 국비 64억4천만 원, 지방비 27억6천만 원, 총 92억 원의 사업비 승인이 떨어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예산 집행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공사 진행은 걸음걸음마다 장애물로 가득했다. 특히 각종 민원에 종종 발목을 잡히곤 했다. 해수담수화시설에 필요한 해수 취수 시설의 위치 설정 과정이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해수담수화시설 인근에 취수펌프장을 두려고 했으나 태풍의 피해가 예상되어 제2의 위치를 물색해야 했다. 추자도의 해안은 대부분 절벽 형태로 이뤄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암반 강도가 강하여 위치 선정에 어려움을 겪던 중 적합한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대를 공동어업구역으로 사용하고 있던 묵리 어촌계에서 환경 훼손을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다. 추자면의 송종수 주무관이 수습에 나섰다. 주민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사업설명회를 열어 사업의 이해도를 높이고 어촌계와 지속적으로 협의했으며, 치어 방류 등 지원 사업을 통해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의외의 복병은 이게 다가 아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정수 처리 후 주민에게 급수하기 전 물을 저장하기 위한 배수지는 가장 높은 지역에 짓다 보니 2곳의 한정된 부지 가운데 선택해야 했다. 부지 확보의 편의성으로 고른 첫 번째 장소는 기능면에서 다소 떨어져 고민하던 차에 나머지 한 곳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부지 소유자가 사망한 상태여서 후손의 소재 파악에 나섰고, 3개월 후 가까스로 후손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냈으며, 이에 대한 답례 차원에서 묘지를 이장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배수지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뿐만 아니라 묘지 이장에 대해 후손은 지금까지도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어렵다고 포기했더라면 향후 30년 이상 운영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공사 중단의 위기도 있었다. 기존 시설 철거 후 같은 자리에 증설 및 신설 공사가 진행되는 이 사업의 특성상, 정수장의 가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선 제3저수지의 저수량이 최소 8만톤 이상 확보되어야 하는데, 2011년 장마철에 비가 적게 오는 바람에 공사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해를 넘겨 이듬해 봄, 야속하게도 가뭄이 찾아왔고 결국 6월 15일 공사가 중지됐다. 그렇다고 손 놓고 하늘만 쳐다볼 수만은 없는 일. 저수지간 도수로 연계공사를 통해 부족한 수량을 채우는 방안이 강구되었다. 제1·2저수지와 제4저수지를 잇고 이를 제3저수지로 연결하는 도수로 공사가 7월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시점인 7월 중순이 찾아왔다. 여기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올해를 또 넘겨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연출될 상황. 결국 7월 13일 전격적으로 공사 재착수를 결정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모험을 건 결정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거짓말처럼 그 때부터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3저수지에 4만 톤, 그리고 저수지간 연계공사를 통해 제1·2저수지와 제4저수지의 물을 제3저수지로 송수해 8만 톤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1일부터 급물살을 탄 공사는 3개월간 밤낮 없이 이어졌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물 자급률 100%를 이루다
추자도 1인 1일 급수량은 2007년 170~229ℓ에서 2013년 340ℓ까지 확대되었다.제주도 평균치이다. 표면해수를 원수로 하여 약간 짠맛이 느껴지고 하절기 조류 등의 발생으로 저수지 용수의 탁도와 색도가 불량하던 부분도 MF 여과막을 이용한 고도정수처리시설 도입으로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주민들은 “추자에 살면서 올해가 가장 물을 풍족하게 쓰고 있다.”며 예전과 달라진 생활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아직 재래식 변기를 사용하던 시골지역 주민들은 화장실부터 수세식으로 교체했다.
어느 지역 또는 건물에서 사용하는 전체 물 사용량에 대한 자체공급량의 비율을 나타내는 물 자급률(Local Water Independency Ratio, LWIR)에서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100%에 도달한 추자도. 제한적인 급수는 물론, 육지에서 물을 받아다 쓰던 시절을 떠올리면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물 자급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매일 급수가 이루기 위해선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다. 먼저, 수십 년간 이어져온 물 공급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옥내급수관 교체 공사가 2014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제껏 추자도에선 각 가정의 물탱크에 물을 저장해두었다가 사용하는 방식 때문에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옥내급수관 교체 공사를 통해 상수도와 수도꼭지를 직접 연결하게 되면 수돗물을 바로 이용할 수 있어 보다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수장에서 공급된 수돗물을 저장하는 배수지의 확장 공사도 필요하다. 현재 2,300톤 규모의 배수지로는 기계 시설의 고장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최소 3~5일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수량 확보를 위해 2016년까지 5,000톤 규모의 배수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빗물 저수지의 안정성을 고려하여 제3·4저수지 내부 차수막 설치 공사도 시급한 과제이다. 총 4만㎡(제3저수지 2만5000㎡, 제4저수지 1만5000㎡)의 면적에 총사업비 40억 원이 투입된다.
물 부족으로 늘 곤란을 겪던 섬에서 도서지역 식수원개발사업의 롤 모델로 떠오른 추자도. 여러 지자체는 물론 건설기술연구원, 포스코건설, 환경관리공단, 수자원공사 등에서 견학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해수담수화와 빗물 이용의 이원화된 방법을 착안한 김우찬 기술사는 많은 공무원들이 사무실이 아닌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관련 전문 학회, 협회, 세미나, 워크숍 등에 적극 참여해 최신의 전문지식을 얻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변화의 실마리를 찾는 길이라고 말이다.
청정해역과 맛 좋은 참굴비, 올레길, 파란 바다 위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다도해까지, 추자도가 관광홍보에 내세우는 ‘다시 찾아가고 싶은 섬’이라는 구호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오랜 숙원 사업이던 물 문제를 말끔히 해결한 추자도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다. 이제는 ‘살고 싶은 섬’이라고 당당히 외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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