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영정중월(詠井中月). 샘 속의 달을 노래한 이규보의 유명한 시편이다. 13세기의 대문호 이규보는 ‘국선생전’이라는 소설로도 유명하다. 이규보의 국선생은 천 년이 지난 오늘, 전주막걸리와 함께 새로 태어났다. 전주 전통주 박물관에서는 지난 4월, 전주 막걸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로 국 선생을 선발하였다. 국선생전의 주인공 국성(麴聖)이라는 이름은 ‘맑은 술’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국성을 이르는 구절을 보자. 《이 아이의 도량이 만 이랑의 물과 같아서, 가라앉히더라도 더 맑아지지 않으며, 흔들어 보더라도 탁해지지 않으니, 우리는 자네와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아이와 함께 기뻐함이 좋네.》
우리 고유의 술인 ‘청주’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전파되며 ‘사케’의 모체가 되었다. 때문에 오늘 날엔 청주를 일본 술로 오인하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고 청주와 탁주의 제조과정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사실 청주는 탁주 위에 고인 맑은 부분을 떠낸 술이다. 청주는 어찌 보면 탁주의 일부인 것이다. 오랫동안 서민을 대표해 온 우리의 술, 막걸리. 탁주(濁酒) 전주막걸리의 정신은 ‘맑은 술’ 국성과 닮아있다.
전주 막걸리 문화
콩나물 국밥으로 유명한 전주는 오랫동안 술로 유명한 고장이기도 했다. 맑은 물에서 잘 자라나는 콩나물처럼 전주의 맑은 물은 술을 빚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더욱이 우리나라 최대 쌀 생산지인 호남평야에서 가장 품질 좋은 쌀을 공수해 올 수도 있었다. 마당문화, 소리문화, 술 문화가 어우러진 전북 땅은 쌀이며 물이며 사람이며 술을 빚기에 최적지였다.
‘가장 한국적인 고장’ 전주 역시 한 때는 맥주와 소주에 술상을 넘겨줘야만 했다. 삼겹살집과 호프집에 그 자리를 내어주던 막걸리 가게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살기 힘들던 IMF를 기점으로였다. 불안한 경제 상황 하에 고단한 하루를 마친 서민들이 값이 싸고 안주가 푸짐한 막걸리를 다시 찾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막걸리 골목이 형성된 것이다. 사실 전주 막걸리 골목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막걸리보다는 ‘안주’ 때문이었다. 인심 좋고 맛좋기로 유명한 전주의 상차림은 막걸리와 천생연분 한 짝이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와 함께 곁들여 나오는 푸짐한 안주는 전주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 멀리 외국인들까지 막걸리 골목을 찾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국선생, 젊은 막걸리 문화로 다시 태어나다
한 때 전주에서는 문화예술인의 단골집인 ‘정읍집’에서 막걸리를 마셔야 진정한 전주 문화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막걸리는 오랫동안 전주를 본고지로 한 예술가들의 젖줄과 같은 역할을 해온 술이기도 하다. 전주시 막걸리 문화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흐름과 함께 피어났다. IMF 경제 위기 이후에 꾸준히 성장한 전주막걸리 시장은 이제 전주시의 독특한 술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막걸리는 더 이상 할아버지들만 찾는 옛날 술이 아니었다. 막걸리가 이제는 단순한 술 이상의,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이들에겐 희미해져 가는 전통문화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특별한 술로,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 등에서는 대표적인 한류주(韓流酒)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양한 시장가능성도 갖게 되었다. 막걸리 투어족이 전주를 찾는 데는 한옥마을의 인기도 한몫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에 묵으며 막걸리 상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늘어났다. 국내를 비롯하여 해외에서도 ‘막걸리 투어’가 생겨날 정도로 요즘 막걸리의 인기는 대단하다. 막걸리는 이제 전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단순한 서민의 술에서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2006년 발족된 전주시의 막걸리 프로젝트는 이러한 다양한 배경에 힘입어 순풍을 달고 출항할 수 있었다. 이에 튼튼한 돛을 달아 준 이가 바로 송하진 전주 시장이다. 본인 역시 시인이기도 한 송 시장은 유명 서예가인 강암 송성용 선생의 아들로 전주의 전통문화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깊은 애착과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기에 막걸리 문화가 전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일례로 막걸리 프로젝트가 시작하던 해인 2006년엔 국정감사 뒤풀이를 삼천동 막걸리 집에서 진행했을 정도로 송 시장의 전주 막걸리 사랑은 지극했다.
2006년 막걸리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땐 이미 전주막걸리 상의 맛과 푸짐함이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다. 막걸리 골목엔 관광객이 북적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전주시는 2007년 막걸리 전문 업소 100여 개를 시작으로 막걸리 골목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면서 홍보, 환경 및 위생, 산업화의 3개 분야 총 14개 단위사업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처럼 다각도로 세분화하여 꾸준히 사업을 추진해 온 전주시의 노력이 있었기에 그 결과 또한 풍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막걸리를 빚는 사람들
전주에는 다른 시에는 없는 독특한 부서가 있다.바로 한스타일관광과다. 전주시는 국내최초, 세계 4번째로 2012년 유네스코에 의해 ‘음식창의도시’로 지정되어 세계적으로 그 음식문화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전주의 음식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스타일관광과의 한식팀이다. 한스타일관광과 한식팀이 막걸리 프로젝트의 중심축이라면 ‘전북대 막걸리 연구센터’와 예비 사회적 기업 ‘수을’은 전주 막걸리 문화의 양 날개와 같다. 막걸리를 사랑하는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북대학교의 막걸리 연구센터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막걸리 관련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있다. 올해 5회를 맞는 ‘국선생선발대회’에서는 매년 새롭고 맛있는 막걸리가 발굴된다. 막걸리와 잘 어울리는 ‘안주’ 개발도 활발하다. 연구센터에서는 막걸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12가지 안주를 개발하기도 했고 청년층과 장년층 여성을 위한 안주를 따로 개발하여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막걸리 지도와 만화, 동영상 등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홍보물도 제작되었고, 막걸리 골목에서 앞치마를 배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어플리케이션 ‘전주 막걸리 이야기’, QR코드제작까지 그 범위도 다양하고 시도도 기발하다. 독특한 모양의 막걸리 잔을 디자인하기도 하고 막걸리를 발효하고 남은 누룩을 이용한 빵과 쿠키도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다.
예비 사회적 기업 ‘수을’에서는 한옥마을에 전통술박물관과 교육관 그리고 작은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다. 2012년 국선생 캐릭터를 공모전을 통해 발굴해 낸 것은 전통술박물관이었다. 전통술박물관에서는 다양한 전통술의 양조과정을 전시하고 있으며 세시풍속주, 계절주, 고문헌, 전통주인문학 등의 강의를 열어 우리 전통 술 문화를 잇는 데 일조하고 있다. 교육관에는 한옥마을을 찾는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막걸리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장기 프로그램을 수강하면 전통주를 빚는 방법을 제대로 배워 볼 수 있다. 한 달 이상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경우엔 상시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으며 80% 이상 출석 시에만 수료증이 배부된다.
2012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는 한옥마을 인근에 작은 양조장을 조성하였다. 고급막걸리를 생산하여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막걸리를 판매·홍보할 목적으로 조성된 양조장은 한옥마을 인근 동문거리에서 운영되고 있다. 양조장의 모든 시설물들은 철저하게 위생적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맛과 향이 우수하다. 엄선된 쌀로 빚은 막걸리들은 와인 병처럼 모던하게 디자인된 병에 담겨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을 중심으로 판매될 예정이다.
전주시 막걸리 골목들
막걸리 프로젝트가 시작되던 해인 2006년 당시 전주에는 삼천동과 서신동, 경원동, 효자동, 평화동 등을 중심으로 한 막걸리 전문업소만 100개소에 달했다. 막걸리 관광은 1박 2일 체류형이 대부분인데 막걸리 골목에서 술을 마시고 한옥마을에서 숙박을 하는 식이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류 열풍과 함께 퍼지기 시작한 막걸리 열풍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았다. 일본관광객들을 위한 막걸리 지도는 개별적으로 전주를 찾는 일본여행객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고, 일본식 ‘막걸리 건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막걸리 관광이 국내외의 대표적 관광코스로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그러한 명성에 비해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막걸리 골목의 상태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2011년에 시작되어 2012년에 마무리된 삼천동 막걸리골목 경관개선사업은 전주시의 대표적 막걸리집 밀집거리 중 하나인 삼천동 외부경관을 개선하는 사업이었다. 사업을 통해 막걸리 상징물과 주막 등이 설치되면서 다소 조악해 보이던 삼천동 술집골목이 정취가 느껴지는 막걸리 골목으로 탈바꿈했다.
전주시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업주들과의 소통이었다. 경관사업을 추진하면서 감수해야 할 사업상의 불편한 점들은 사업 설명회와 업주 간담회 등을 통해 말끔히 해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막걸리골목상가번영회의 활약으로 주민과 업주들의 의견도 상당부분 수렴되었다. 술 냄새와 음식 찌꺼기들로 다소 지저분한 인상을 주던 막걸리 골목에 띠 녹지가 조성되었고 보도블록이 교체되었으며 미끄럼방지 포장과 험프시설이 설치되어 이용자들의 안전까지 확보되었다. 또한 특화거리로서의 심미적 기능을 강화하여 골목 입구에 상징물도 제작되었다. 거리가 깨끗해지자 상인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업소별로 사비를 들여 시설 내부를 청결하게 개·보수하기 시작하는 한편 고객대응도 달라졌다. 골목이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자 업주들의 사업의식 또한 자연스럽게 개선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전주에 오면 한정식, 비빔밥, 콩나물 국밥 그리고 막걸리를 맛본다. 전주 막걸리 골목에서는 아직도 주전자 단위로 술을 판매한다. 한 주전자를 시키면 한 상 가득 전주의 손맛이 담긴 안주가 곁들여 나온다. IMF를 기점으로 부활한 전주시의 서민 문화 막걸리는 낙후되었던 막걸리 골목을 활성화시켰고 이는 어려웠던 시절 막걸리로 시름을 달래던 전주시 서민 상권을 부활시켰다. 우리 전통문화의 힘은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막걸리 프로젝트의 성공 역시, 이처럼 오랜 시간 우리 문화유산을 소중히 지켜온 전주시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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