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BIS 뉴스레터 2022-23호 ]
새로운 시대의 지역도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전정환
커뮤니티엑스 대표
목차
운 좋은 일이 일어나는 도시 만들기
남성의 중공업 도시 시대에서 여성의 라이프스타일 도시 시대로
해결책은 도시간의 연결을 통한 장기간의 변화에 있다
운 좋은 일이 일어나는 도시 만들기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만나고 서로가 가진 자원을 나누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장소다. 도시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인류의 최고의 발명품은 도시”라며, 도시의 인접성·친밀성·혼잡성은 인재와 기술, 아이디어와 같은 인적자원을 한곳에 끌어들임으로써 도시는 혁신의 중심지로 부상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디트로이트에서 자동차 산업이 시작되고 실리콘밸리가 IT 스타트업의 성지가 되는 등에 있어 도시와 창조적 혁신은 항상 함께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서울을 제외하고는 지역도시들은 도시성을 점차 상실해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기업 중 상당수도 초기에 지역도시에서 작은 기업으로 설립되었다.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던 삼성상회는 1938년,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는 1954년 대구에서 설립되었다. CJ그룹의 모태가 된 제일제당공업은 이보다 1953년 부산에서 설립되었다. LG그룹은 1931년 경남 진주의 구인회 상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후에 모든 자원이 서울로 집중되면서 고도성장을 하게 되었다.
기업과 인재들이 서울로 계속 몰려드는 이유는 그곳에 가야 '운 좋은 우연한 기회'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네트워크가 서울을 중심으로 몰려 있는 한, 서울 밖에서는 이러한 우연한 운 좋은 기회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청년들에게는 이것이 딜레마다. 서울에서 운 좋은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높은 임대료 등 비용을 생각하면 결코 운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청년들은 이를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역은 오랜 기간 수도권으로 청년 인재들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지역에 거주하는 청년 인구마저 급격히 줄어들면서 수용 없이 공급만 해오던 지역이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개발도상국 시기, 산업화 시기 때와는 달리 청년들이 원하는 좋은 직장은 단순히 급여가 높은 곳이 아니라 자신에게 성장 기회를 주는 곳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훌륭한 선배와 동료들이 있어야 한다. 또한, 과거와 달리 평생직장의 시대는 사라졌고 청년들은 이직을 통해 자신의 커리어를 향상시킨다. 이직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좋은 기업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청년들은 성장 기회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며, 자연스럽게 지역도시에 청년들이 더이상 머무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지역거점도시들이 '운 좋은 기회'가 생기는 도시성을 되찾아야 한다. 지역 거점 도시가 도시 내의 다양성을 연결하고 도시와 인근 주변 지역들 간의 연결성을 통해 그 지역만의 운 좋은 도시를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중공업 도시 시대에서 여성의 라이프스타일 도시 시대로
대한민국은 갈수록 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도시간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체감하는 정도가 크게 다르다. 서울에서는 젊은 세대들이 넘쳐나고 매일 일상에서 엄청난 인구 밀도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과밀이 일상화된 이들이 한국이 현재 인구절벽에 임박했으며 지역소멸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는 어렵다. 전혀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다가온 현실인 것이다.
인구감소 문제를 가장 먼저 체감하는 지역도시들이 가장 먼저 대응책들을 내놓았다. 이들은 가임기의 젊은 여성들이 줄어드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들이 와서 자신의 지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도록 많은 장려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여성을 출산과 육아의 도구로 여긴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으며 실효성에 있어서도 의구심을 받고 있다.
지금 시대의 여성이 원하는 도시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변화는 도시의 성격과 흥망성쇠에 과거에도 큰 영향을 미쳐 왔다. 1960년대 경공업 시대는 남성의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여성이 산업의 역군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강남의 자녀 교육 열풍의 주인공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이제 변화했다. 여기에 맞는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지역 도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전국적으로 볼 때 서울은 여성의 비율이 꾸준히 높아져온 반면, 지역 도시 대부분은 여성의 비율이 낮아지고 있다. 여성들은 서울에 살고 싶어한다. 이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여성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있는 곳이 여성이 살고 싶은 도시다. 그런 일자리가 부족한 지역에서 여성들은 떠나서 서울로 가는 것이다.
1970년대, 1980년대 중화학공업도시들이 탄생하고 성장할 때는 달랐다. 남성들이 먼저 울산, 포항, 창원, 거제, 광양 등에 가서 높은 급여의 일자리를 얻어 자리를 잡았고, 여성들이 이곳에 와서 남성들과 결혼하고 정착했다. 이들은 아이를 낳아 키워서 서울 등에 유학을 보내는 등 풍요로운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한국이 경제적 선진국이 되고 2000년대 들어서서 상황은 달라졌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의 저자 경남대학교 양승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딸들은 거제를 떠나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아빠의 믿음을 저버렸다. 노동자들의 ‘단순한 삶’은 나름대로 예찬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나, 가족 안에 머무르기를 꺼리는 이들에게 그것은 한낱 보수적인 삶의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중공업 가족은 빈축을 샀다.”
중공업 도시에는 여전히 남성들의 일자리가 많다. 이제 중공업 도시에서 청년들을 채용해도 오래 가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떠난다. 청년 남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경제적 소득 수준 때문이 아니다. 우선 과거의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그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그 도시에 청년 여성들이 없다면 청년 남성들은 연애도 결혼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청년 남성들이 그 도시에 가고 싶어하겠는가?
과거의 성공 방정식은 이제 잊어야 한다. 돈 잘 버는 남편이 있고 아이낳기 좋은 도시가 아니라, 일하고 살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에 여성들이 모여든다. 그런 여성들이 있어야 남성들도 모여든다. 그들은 그 도시에서 그들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게 될 것이다. 서울과 같이 과밀한 도시, 경쟁이 심한 도시에서는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기를 포기하는 이들이 많지만, 지역 도시에서는 다르다. 과밀하지 않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면 자연스럽게 출생률은 올라가게 될 것이다.
해결책은 도시간의 연결을 통한 장기간의 변화에 있다
대한민국의 중공업 도시의 부상은 미국과 유럽의 중공업 도시의 본격적인 쇠퇴 시기와 맞물린다. 그곳에서 중공업 도시들이 문을 닫고 새로운 도시의 활력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 한국의 중공업 도시들은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21세기에 경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중공업 도시들은 도전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만일 새로운 계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후발 국가들의 추격과 함께 한국의 중공업 도시들은 쇠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변화의 출발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도시 간의 연결성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은 다른 지역과의 연결성 속에서 성장했다. 일산과 분당은 서울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베드타운으로 설계되었으며, 판교는 서울에서 성장하는 IT기업들이 자리 잡으며 완성되었다.
이미 수도권에서는 사람들은 도시와 도시를 넘나들며 살고 있는데, 지역은 기초지자체를 중심으로 정책을 설계하다 보니 이러한 연결성에 대해서 간과하기 쉽다. 광양은 조선시대에 전세계 처음으로 김을 양식한 곳이고, 매화로 유명한 곳이지만 중공업 도시의 성격이 워낙 강해진 이곳에 로컬크리에이터들이 지금 당장 모여들고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창의적인 라이프스타일 산업도 커나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20년의 장기간의 시간을 두고 중공업과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함께 하는 창의적인 도시가 되기를 목표로 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의 설계는 도시와 도시 사이의 연결과 시너지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순천역에서 광양제철소까지는 27.7km로 차로 40분 이내 소요 거리다. 순천의 전라남도 동부권 통합청사와 광양시청 사이는 18.1km로 차로 21분 소요 거리다. 광양과 여수는 이순신대교가 놓이면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여수의 아파트 가격이 오르자 광양의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여수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경상남도 남해는 33.9km로 40분 이내의 소요 거리다. 일산 대화역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30.5km인 것을 생각할 때 충분히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일과 삶의 장기간의 변화에 대한 상상력과 실천이 필요하다. 순천의 로컬크리에이터 여성과 광양의 제철소를 다니는 남성이 결혼을 해서 순천에 신혼집을 차리고 광양으로 남편이 출퇴근한다. 남해에서 독립서점을 하는 여성과 광양의 제철소에서 일하는 남성이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주말 부부를 한다. 그러다가 그들이 아이를 낳을 때는 광양시의 서부의 베드타운으로 이주하여 아이를 키운다. 아이가 커서 고등학교를 갈 때는 순천으로 이사해서 순천고등학교를 보낸다. 이렇게 사람들이 더 원활하게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초지자체들은 서로 협력하여 대중교통 등 인프라를 늘리고 정책을 조율해낸다면 어떨까?
이렇게 해서 도시간 연계를 통해 더 일하며 살기 좋은 도시가 되어간다면, 시간이 지날 수록 이들 도시의 커뮤니티 자본을 풍성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10년, 20년이 지나면서 광양시도 로컬크리에이터들이 자리잡고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중공업과 함께 공존하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도시 내, 도시 간 커뮤니티 자본을 통해서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서울, 경기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은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광역지자체의 거점이자 허브 역할을 해왔던 부산, 대전, 대구, 광주와 같은 광역시이다. 둘째, 산업화 시대에 커나간 울산, 창원, 포항, 광양과 같은 중공업 도시다. 셋째, 제주, 강원, 남해와 같은 라이프스타일 도시다. 넷째, 전주, 경주, 공주와 같은 문화역사 도시다.
이들 도시들은 각각 가지고 있는 문제와 강점이 다르다. 광역시는 서울로 인재와 기업들이 가기 위한 관문이 아니라 인근 지역의 거점으로서 허브로서의 연결과 창조의 도시성을 되찾아야 한다. 중공업 도시는 새로운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다양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라이프스타일 도시는 관광에 머물지 않고 지역에 창조산업이 싹 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화역사 도시는 문화역사 자원을 과거의 전통으로 박제화시키지 않고 현재성, 대중성을 가진 새로운 가치로 재탄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도시의 변화는 도시의 정주 인구만을 중심으로 보면 가능하지 않다. 도시와 도시의 경계를 넘어서 다니는 관계 인구들이 도시의 다양성을 높이고 커뮤니티 자본을 키우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도시 내의 다양한 창조성의 주체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연결해내고, 도시간의 연결성을 통해서 서로 시너지를 창출하며 변화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간과 공공의 협력도 필요하다. 광역지자체는 기초지자체들을 서로 연결하고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장기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변화관리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광역지자체는 예산투입을 하고 관리감독을 하던 기존의 역할에서 변화해서 지식경영을 할 수 있도록 경영혁신을 해 내야 할 것이다.
영국의 도시 컨설턴트 찰스 랜드리는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도시를 추구하지 말고 세계에 이바지하는 가장 창의적인 도시를 만들고자 노력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개인, 집단, 외지인을 그 도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구 전체와 더욱 긴밀하게 이어주는 ‘연대의 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의 커뮤니티 자본을 키우는 것은 바로 도시가 서로 도우며 성장할 수 있도록 가는 길이다.
전 정 환
커뮤니티엑스 대표, 크립톤 파트너
전산학과 예술경영을 전공했으며,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개발 본부장, 로컬서비스 본부장, 경영지원 유닛장 등을 역임했다.
2015년부터 7년간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센터장 임기를 마친 후,
현재 커뮤니티엑스 대표와 크립톤 파트너를 겸임하고 있다.
저서로 시대를 전환하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혁신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밀레니얼의 반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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