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
균형발전 기사 큐레이터
목차
오롯이 당신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
통영이 스며든 사람 장윤근, 장윤근이 스며든 통영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다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약국집 딸들」, 박경리
■ 오롯이 당신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
2022년 10월 13일. 항구의 모습이 보일락말락한 명정동 골목에 자리한 한옥 스테이, 잊음. 오후 세 시. 체크인 시간이 되자 길목 따라 달려오던 스쿠터 소리가 대문 앞에 끽 멈춰 섰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방에 누빔 이부자리를 깔아 정돈하고, 차를 권하는 한옥지기 장윤근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7년 전 처음 스테이 운영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주말 투숙객만 있던 곳이 이제는 단골 투숙객이 생기고 평일예약도 꽉 찬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쭉 나고 자랐다는 윤근씨의 입에서 술술 쏟아지는 통영과 서피랑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공간에 가득 찬 것은 비단 투숙객들의 예약뿐만이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옥지기가 손수 다듬고 꾸려넣은 지역문화 컨텐츠들이 공간 곳곳에 가득 자리하며 골목을 지나는 나그네들을 기다리고 있다.
스테이 '잊음' 내/외부 모습
Q1. 한옥은 계절마다 구석구석 다른 손길을 필요로 할 테고, 매번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꼼꼼하게 정성을 들여야 할 일들의 연속일 것 같아요. 한옥지기 장윤근님의 하루 일상이 궁금합니다.
A1. 여름에 장마철 태풍철이 되면 물이 새는게 가장 큰 문제였는데, 작년에는 마음먹고 지붕 기왓장을 다 걷어내고 보수를 했어요. 사람이 안전하고 아늑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하는니까요. 조금만 소홀해도 서까래 대들보 구석구석 나무 틈 사이로 먼지나 거미줄이 쌓여서 매일 청소를 하고, 보수가 필요할 때마다 다듬고 매만지고 있습니다. 체크아웃 전에 머무신 손님들께서 잊음 동네 가이드를 원하시면 함께 동네마실을 가요. 손님들의 관심사에 따라서 코스도 달라지구요. 통영을 구석구석 함께 걷습니다. 아! 정원에 대추나무 감나무 귤나무에 주렁주렁 열매가 맺히는 때에는 청을 담궈 손님들에게 나눠드리기도 해요.
Q2. '잊음'을 '오롯이 당신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 이라고 소개하시잖아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무형의 컨텐츠들 중에 장윤근님의 마음에 가장 와닿는 이야기나 소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A2. '책'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네요. '잊음' 공간이 박경리 선생님 소설 「김약국집 딸들」의 배경이 되는 하동집이기도 하고 문학과 뗄 수 없는 장소성을 지닌 곳이거든요. 옆 책장에 보시는 것처럼 박경리 선생님 작품 외에도 다양한 책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어요. 손님들이 머무시다가 빌려간 후 재방문하시기도 하고 또 잊음공간에 어울리는, 머무르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을 보내주시기도 해요. 똑같은 책이 생기면 손님들에게 나눠드리기도 합니다. 같은 책이지만 읽는 사람들에 의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그 덕분에 책 한 권, 한 권, 책장 마다에도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요.
'잊음' 공간 기획전시 포스터
코로나의 여파로 관광객들이 줄고 비대면이 많아졌던 2020년에는 '잊음' 공간에서 지역장인분들과 청년작가들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이자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전시를 기획했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들의 방한과 보호기능을 높이기 위한 군수품을 제작하면서 시작된 통영 누비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정숙희 작가의 독자적인 작품전 '잊음 봄을 누비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4호 염장 조대용 선생님의 개인전 '대발 : 여름을 숨기다', 통영 바다의 향토 식재료를 조사하고 모아 한상차림을 기획한 '통영한상'은 지역문화와 예술을 기반으로 한 상생의 결과물이다.
Q3. 2020년에 진행된 통영 청년크리에이터들의 모임, '매듭'의 세 가지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지역의 익숙한 수공예·식음 문화이지만 다함께 전시를 기획하는 일련의 준비 과정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많은 공부를 하셨을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아주신다면요?
A3. 무형문화재 제114호 염장 조대용 선생님과 대발 전시가 가장 기억나요. 전시를 준비하면서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대발을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만드는 과정, 대발을 엮는 법, 대발에 들어간 문양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그 시간이 저에게 정말 소중하고 뜻깊은 시간으로 남았습니다. 전시를 시작하고 서울, 부산, 대구 등 다양한 곳에서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또 전시를 통해 많은 판매가 이루어졌는데, 단지 대발이 팔린 것이 아니라 대발을 엮는 선생님의 시간과 정성을 함께 드린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통영의 멋이 가득 담긴 작품들이 조명 아래 전시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 수 있도록 전시한 작품중 일부는‘잊음’공간에 머무시는 동안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해두었습니다!
'우리가 잘하는 걸 재밌게 하자'는 슬로건으로 10년 동안 의미 있는 활동을 지속해 온 '옐로우가드 프로젝트'는 회원도, 회비도, 회칙도 없는 통영의 청년 모임이다. 1년에 한 번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시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또 얻은 수익은 지역사회에 환원한다.
Q4. 지역균형발전과 청년정책의 일환으로‘매듭’프로젝트같은 (청년공동체활성화) 사업이나 지역한달살기등의 인구유입 정책들이 진행되고 있잖아요.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단기이벤트가 아니라 통영의 자발적 청년모임인 '옐로우가드 프로젝트'처럼 장기적으로 운영되서 통영의 문화이자 새로운 동력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나 어떤 뒷받침이 필요로 할까요?
A4. 질문에 답이 있는 것 같아요. '자발적'이라는 그 단어말이에요. 이 일에 자발적인 관심이 있어야하고 그래야지 힘들어도 그 안에서 재미를 더 느낄 수 있으니까요. 옐로우가드 프로젝트는 규율도 없고 뚜렷한 노선도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그 동력은 어떤 특정한 노력이나 제도적 뒷받침이 아니라 지역에서 맺어온 사람간의 관계성이 자연스레 꽃을 피운 것 아닐까요? 피어보니 그 모양도 향도 아주 좋은 꽃이 돼서 사람들이 계속 모이고, 다 함께 오래 가는 거죠.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통영 2' - 백석
Q5. 올 해 7월에는 숙박객도 받지 않으시고 잊음에서 '파도의 얼굴'이라는 전시를 진행하셨었죠. 통영은 바다의 땅이라고 불리울만큼 바다의 의미와 영향력이 클 것 같은데, 특히 지역민분들의 반응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파도의 얼굴' 포스터 / 전시현장 1,2
A5. 네, 맞아요. 통영은 어디를 가나 바다가 항상 옆에 있어요. 아주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죠. '당연하게 여기는 걸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전시 기획을 준비 했습니다. '관광객들보다는 지역민이 더 보러 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관광객 보다 통영분들이 전시를 관람하러 많이 와주셨어요. 그래서 전시 기간동안 지역민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구요. 과연 통영에 바다가 없다면? 내게 바다는 어떤 영향을 주는걸까? 서로 생각해보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죠. 다양한 파도의 색을 마음 한 켠에 담아간다는 분도 계셨고, 통영이 고향인데 지금은 스페인에 사는 분께서는 작품을 사가셨어요. 바르셀로나에 가서 고향의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면서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전시기획이었습니다.
Q6. 윤근님이 출연하셨던 창원 KBS TV <휴먼터치-통영편>에서 "그냥 이 동네를 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요."라는 말이 너무 따뜻해서 잠시 화면정지를 해놓고, 몇 번이고 되뇌었어요. 제가 우리동네를 걸어다니면서 느끼는 감정들도 떠올랐구요. 생선 말리는걸 배워보고 싶다는 장윤근님의 말에 단번에 "배우고 싶으면 여기 와서 배우면 돼."라고 답해주시는 시장의 생선가게 사장님 답변도 인상 깊었어요. 저게 장윤근님이 통영에서 살아가는 힘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근님이 통영에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와 원동력은 무엇이에요?
A6. '바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하게 다른 통영바다. 살아가면서 사람은 사람에게 부딪히는 존재가 될 수 있지만 바다는 그저 사람을 포용하는 것 같아요.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처럼요. 통영사람은 누구나 바다에 기대서 사는데, 아무말 없이 바다는 그걸 다 받아줘요. 바닷일의 고됨으로 통영사람의 말투나 성정이 까칠하고 고약하게 느껴져서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는데, 그 바다가 또 위로와 치유가 되니까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러니죠. 바다와 바다에서 나오는 모든 통영스러운 것들이 나고 자란 이 곳에서 쭉 살아가는 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Q7. 농촌마을처럼 어촌마을 또한 인구감소·고령화·지방소멸의 안타까운 이슈가 항상 도사리고 있잖아요. 윤근님이 그리는 앞으로의 통영은 어떤 모습인가요?
A7. 전에는 인구감소나 지역발전에 대한 걱정을 진짜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재미있게 살아가면 되더라구요. 대신 '그대로 멈춰있지만 말자'고 생각해요. 지역으로 돌아 올 사람들이나 새로 정착 할 사람들에 따라서 통영을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훗날에 저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섬에서 자유롭게 살겠다는 꿈은 있어요. '섬은 폐쇄적인 곳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섬에서 뭍을 바라보면 뭍이 폐쇄적인 것 같거든요. 섬처럼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가 일상에서 평온과 쉼을 가득 얻으면서 살아가면 통영은 그 모습을 잃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아, 한가지! 지역 어르신들은 서울에 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경쟁이나 성공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생각들은 좀 지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Q8. 지역 토박이와 외지인이 함께하는 작당은 엄청난 시너지를 내는 것 같아요. 서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장윤근님이 통영에 새로 정착한 분들과 어떻게 교류하고 함께 하는지 궁금합니다.
A8.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그럴듯한 교류나 협업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특별한 건 하나도 없어요. 하고 싶은 걸 하는 것. 그것 뿐이예요. 한 번 해볼까? 같이 모여볼까?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자발성 하나 가지고 쭉 가는거예요. 아무런 틀도, 그럴듯한 목표도 정체성도 갖지 않은 채로 그냥 돌아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함께 하거나 바다에서 놀고 떠나기 전 쓰레기를 함께 줍거나 자연을 더 살피는거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통영 안에서 갖는 우리들만의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그 관계성이 뿌리내리지 않나 싶습니다. 성장하려면 먼저 그 뿌리가 견고해야 하는것처럼 그 작당들은 쌓여 큰 힘을 갖겠죠.
사람들이 기업과 일자리를 찾아서 이동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이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다. 도시의 성공을 위해선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끌어오는 것이 맞다.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2018) - 리처드 플로리다 著
Q9. 미국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는 비공식적이지만 공식적인 슬로건이 "keep it weird"라고 하더라구요. 요상하고 다양한 인재들이 지역(통영)에 올 수 있도록 지역(통영)에서 새로운 기회와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가고 싶어하는,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9. 남들과 비교하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세요. 어느 지역이든 낯선 곳에 마음 붙이는 일은 용기가 많이 필요 할 거에요. 저도 혼자 기획하고 추진하다 보니 심적으로 힘들고 방향을 잃었던 적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소도시도 많이 달라졌어요. 지역에서 비즈니스를하며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꾸려가는 멋진 친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서로 상생하면서 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작점이 무엇이 되었든 어디가 되었든 혼자서 갈팡질팡하기보다는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많이 만나 보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치 입에 맞는 음식이 제각각이듯 예술과 문화도 지역마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
예술과 문화의 '지역간 균형'은 무엇보다 다양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역의 예술이 살고, 그것을 토대로 문화가 살아야한다.
예술과 문화, 지역균형발전의 키워드(2005) - 오세곤
■ 통영이 스며든 사람 장윤근, 장윤근이 스며든 통영
우리나라 오천만 인구가 모든 지역에 고루고루 분포해 산다면 그것이 균형발전일까?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이 모든 지역에 똑같은 규모로 지어진다면 문화적 지역균형발전이 이루어질까? '잊음' 공간 곳곳에는 통영의 멋이 흘러넘친다. 공간을 매개로 다양한 사람들이 맺어가는 관계성과 함께 지역장인들의 수공예품이 내뿜는 지역문화의 참된 멋 말이다. 이번 통영 방문과 취재는 문화적 지역 균형발전이란 지역의 예술문화가 살아나고 그 다양성을 토대로 서로의 가치를 알아 봐주고 존중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여정이었다. 지역 불균형은 많고 적음의 수치에서 오지 않는다. 지역의 고유하고 다양한 멋을 잃어가는 맥락에서 지역민들이 느끼는 허망함이나 안타까움에서 시작되는 것일테다.
우리 모두가 서울 한 곳이 아니라 '나'의 정서와 결이 잘 맞는 지역을 찾아보고, 머물러 보는 것에서 균형발전의 싹을 틔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관할구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지, 만 나이가 몇인지 등의 행정적 기준으로만 지역민과 청년을 재단하는 대신 지역 문화에 얼마나 스며들었는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성을 맺고 있는지 등의 유의미한 기준과 새로운 척도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낸다지만, 사람이 나면 로컬로 보내보자! 그 다양한 작당들이 지역 곳곳에 스며들어 반짝반짝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참고자료 및 자료출처>
'잊음'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ismstay
kbs <휴먼터치> - 즐거운 나의 통영(2018)
예술과 문화, 지역균형발전의 키워드 - 오세곤(2005)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 리처드 플로리다 著(2018)
백석 시 '통영2'
박경리 소설 「김약국집 딸들」